무연고 사망자를 추모하는 공간
현대사회에서 죽음이 우리 삶과 멀어지고 터부시되는 것처럼, 무연고자의 삶과 죽음도 우리의 기억과 관심 속에서 멀어져 있었다.
무연고 사망자를 추모하는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분명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 모두를 위해 의미 있는 공간일 것이다.
현대인과 장례문화
건축가 승효상의 저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그러나 선생의 유해를 모시고 간 벽제 화장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역 대합실같은 사나운 분위기에, 몰지각한 선전벽보에, 인간미 없는 안내방송에,
게다가 염불소리·목탁소리·찬송가소리·기도 소리·······. 아아, 울음과 슬픔마저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예의 없는 화장장은 죽음마저 희화화하였으니,
갑자기 선생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이 엄습했다.그게 다가 아니었다. 선생의 유분을 모시는 납골묘의 현장에 가서 그 저질스러운 죽음의 형식을 다시 보고는 차마 선생의 영정을 마주할 수 없었다.
괴기스러운 석곽과 비석의 모양을 조금이라도 바꾸려 관리소에 문의했더니 규정 위반이라고 하였다.
승효상,『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서울: 컬처그라피, 2012년, P.96.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 불편한 공간, 죽은 자의 존엄성은 온대 간 대 없고, 경제 논리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현대인의 장례문화를 잘 나타내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무연고 사망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추모 공간은 전통적인 대가족 사회나 적어도 최근의 핵가족 사회와 같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죽어가는 문화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최근 들어 부각되고 있는 사회 이슈 중 하나가 1인 가구의 증가인데,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고독사', '무연고사' ?이다.
무연고 사망이란 사망 후 연고자를 찾지 못한 경우를 뜻한다.
연고자가 아예 없거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 연고자가 있지만 사회·경제적 능력 부족, 가족관계 단절 등 다양한 이유로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경우까지도 모두 포함한다.
무연고자는 죽어도 제대로 장례를 치르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추모 공간에 안치된 뒤에는 또 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홀로 사는 노인이 사망하면 관할 지자체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과 보건복지부의 '무연고 시체 등의 처리 매뉴얼'에 따라 연고자를 찾아 통보한다.
연고자가 없거나 가족들이 사체 인수를 포기하면 지자체가 대신 주검을 수습하는데, 별도의 장례식 없이 화장터로 직행하는 게 보통이다. (이를 '직장(直葬)'이라고 부른다.)
무연고자의 장례절차가 끝난 뒤 안치되는 곳은 서울 시립 용미리 제1묘지의 한구석에 있는 무연고 추모의 집이다. 화단과 조경 나무로 치장된 다른 봉안시설과 달리 이곳은
아담한 회색빛 화강암 건물 한 채가 전부다. 얼핏 보면 창고로 오해할 만한 건물에 무연고 사망자의 유골 2900여 위가 안치돼 있다. 안은 관공서 서류창고 같다.
도서관처럼 철제 선반이 나열돼 있고, 선반 위에 같은 크기의 유골함이 우유팩처럼 쌓여있다. 장사법에 따라 무연고자의 유골은 이곳에서 10년 동안 보관된 뒤에,
아무도 찾아가지 않으면 다른 유골과 합동으로 매장된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무연고자의 죽음이 쓸쓸하지 않도록 장례식을 치러준다고는 하지만 +, 무연고 추모의 집에 안치된 뒤에는
결국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것이다. 10년 안에 누군가가 유골을 찾아간다면 다행이겠지만, 연고자가 유골을 찾아가는 것은 1년에 2~3건에 불과하다.
결국은 다른 무연고자들과 합동으로 매장될 운명인 것이다.
자신의 죽음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각자의 삶을 살다가 다양한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 삶과 죽음은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개념인 것 같지만 삶의 끝에는 항상 죽음이 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의미가 있듯이 죽음이 있어야 삶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죽음의 문턱에 있지 않은 이상, 인간은 특별히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이 터부시 되고, 죽음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도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나마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은 추모 공간에 방문했을 때일 것이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추모 방식의 제안




천은 사람의 손길이나 움직임, 빛과 그림자 같은 주변 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나타낸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간의 삶과 시간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재료이다.
이번 설계를 통해 천을 이용한 새로운 추모의 방식을 제안한다. 기존의 추모공간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유골함 또는 관이라는 답답한 공간에
죽은 사람을 가둬놓고 있다. 새로운 추모공간에서는 천과 자연스럽게 교감하며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흐름과 머무름
사례 조사를 통해 흐름과 머무름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었던 바, 어느 한 가지 키워드에 치우치지 않고 흐름과 머무름의 공간적 체험이 공존할 수 있는 스페이스 프로그램을 생성하였다.
방문객은 일상의 연장선상의 공간으로 들어온 뒤 천과 교감하며 무연고자를 추모하게 된다. 그 뒤, 고요한 사색의 공간에 진입하여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친밀한 공상의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모든 행위가 끝난 뒤 삶과 죽음이 함께 한 상태에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공간에서는 추모행위 뿐만 아니라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공간을 방문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죽음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뿐만 아니라
함께 추모를 할 수도 있다. 사례조사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추모행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치를 만듦으로써,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천과 교감하며 무연고자를 추모하다.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하다.

여러 사람들과 죽음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다.
결론
본 설계는 죽음에 대한 인식의 틀을 깨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냥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금기시하고 터부시하는 사회의 통념을 바꾸고 싶었다.
사례조사를 통해 죽음을 터부시하는 분위기는 비교적 현대의 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EBS 다큐프라임 ‘데스’에서 평범한 아이들과 어른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을 통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고민해 본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남을 배려하거나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죽음이 우리 삶에서 멀어지고
터부시되었던 것처럼, 무연고자의 삶과 죽음도 우리의 기억과 관심 속에서 멀어져 있었다. 무연고 사망자를 추모하고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분명 죽은사람과 살아있는 사람 모두를 위해 의미 있는 공간일 것이다.
